한용운 시의 현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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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년 8월 10일(화)에 열린 만해 서거 60주년 학술세미나의 발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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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시의 현재성

정 남 영

1. 글머리에

본 발제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한용운의 시를 ‘시로서’ 세밀하게 살펴보는 것이다. 이 ‘시로서’라는 (마치 동어반복처럼 보이는) 말이 여기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언어의 다른 조직형태와는 달리 의미를 창출하는 시의 고유한 방식에 집중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상 시를 읽는다는 것을 시의 이러한 고유한 특질에 독자의 고유한 사유가 반응하는 것이지 시의 내용을 단순히 다시 풀어쓰거나 심지어는 환원적으로 요약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본 발제자의 지론이다. 좋은 시라면 어떤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발제문의 뒷부분에서 특별히 「님의 침묵」 전문을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한 편의 시의 고유한 ‘존재’를 보여주고자 했다.1

이 과제에 있어서 본 발제자의 주된 노력은 한용운의 시가 얼마만큼 살아있는지를 말하는 데 쏟아질 것이다. 여기서 본 발제가가 말하는 ‘살아있음’은 아직도 많은 독자들에게 읽힌다는 의미가 아니라2 시가 그야말로 생명체처럼 살아있음을 말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는 간단한 답이 있을 수 없으며, 본 발제자로서는 이 발제문 전체가 그 답으로서 어느 정도 만족할만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시읽기가 시의 고유성과 독자의 고유성이 만나는 것이라면, 시읽기는 사람마다 조금씩이라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본 발제자의 논의는 그 일반화된 결론―‘한용운의 시는 현재성을 갖는다’―만을 보면 기존의 많은 평론들과 그다지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차이점은 이러한 결론의 공통점보다도 그 논의과정에서 드러날 것이다.

2. 정서와 사유의 통일―“감정과 이지가 마주치는 찰나”

한용운의 시들3을 읽으면서 금세 느껴지는 것은 그가 이른바 ‘서정주의’(抒情主義) 즉 시를 오로지 정서 혹은 감정의 전달로 보는 사고방식에서 훌쩍 벗어나있다는 점이다.4 “나는 서정시인이 되기에는 너무도 소질이 없나봐요”(「예술가」)는 비록 시 속의 화자의 말이지만, 조금 변형시켜 적용한다면 한용운에게 크게 부적절한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박이 있을 수 있다. 「예술가」의 화자는 인용된 부분에 이어서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그런 것은 쓰기 싫어요”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서 한용운의 시들은 ‘슬픔,’ ‘사랑,’ ‘눈물’의 시가 아닌 것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이는 한용운이 기본적으로 ‘서정’에 치중한다는 증거인가?

그렇다고 보기는 힘들다. 우리는 한용운의 시들을 읽으며 그 전체를 어떤 절실한 마음이 관통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절실함이 ‘님의 부재’―‘님’이 무엇이 되었든― 혹은 ‘이별’이 나타내는 현실적인 상황으로부터 기인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절실한 마음은 사유와는 별도로 혹은 미약한 사유를 동반하면서 제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님의 침묵」의 시들은 이 절실한 마음으로부터 추동된 시적 사유의 전개양태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부분적으로 보면 정서의 전달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정서들을 통괄하는 것은 절실하게 느껴진 삶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진지한 사유인 것이다.

우선 주목할 것은, 한용운은 ‘슬픔’과 ‘눈물’을 이야기하고 ‘님’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감정에 겨운 듯한 영탄조의 사용이 잦지만, 그 제시방식으로 ‘논증적인’ 형태, 즉 이성적으로 따지거나 추론하는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런 경우 사유의 흐름은 ‘만일,’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러면,’ ‘그래서,’ ‘그러므로,’ ‘다시 말하자면,’ ‘~ 까닭(에, 입니다)’ 등의 논리적 연산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접속어들로 연결되거나5 아니면 명제들의 (때로는 연속적인) 삽입을 거쳐 진행된다.6 이러한 논증적․명제적 제시방식은 그의 시들이 정서에의 탐닉이 될 수 없게 만든다.

물론 이런 논증적 형태가 그 자체로 한용운 시에서의 시적 사유의 존재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시적 사유는 논증적 사유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고 다양한 것이며, 논증적 사유가 이러한 시적 사유 속에 통합될 때에는 단순히 논증적 기능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능을 할당받게 된다. 「사랑의 측량」은 “즐겁고 아름다운 일은 양이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라는, 누구나 수긍할 만한 명제에서 시작하지만 이는 곧 “그런데 당신의 사랑은 양이 적을수록 좋은가봐요”라는 뜻밖의 말로 이어진다. 우리는 수학 문제를 풀 때와 같은 논증을 몇 줄 더 따라가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시인은 ‘사랑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거리에 비례한다’는 궤변에 가까운 기발한 생각을 논증적 형태로 전개하여 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사랑의 양은 많아진다는 (어찌 보면 엉뚱하지만 ꡔ님의 침묵ꡕ의 시들 전체의 맥락에서 곱씹어 보면 중요한 진실을 담은) 생각을 도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가 진정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바는 ‘따라서 님의 부재가 더 좋다’라는 식의 형식적 결론이 아니다. 시 전체가 전달하는 것은, 화자를 울림에도 불구하고(“그런데 적은 사랑은 나를 웃기더니 많은 사랑은 나를 울립니다”) 이별 후에 오히려 더 커진 사랑의 마음―그리움―이다. 논증적 방식은 상식을 뒤엎거나 보통의 경우에는 떠올리지 못하는 기발한 생각과 결합됨으로써 절실한 그리움을 전달하는 데 복무하게 된 것이다.

기발한 착상(기상, 奇想)7을 활용한 다른 예로 「님의 손길」을 하나 더 들어 보자. 첫 연의 마지막에 “그러나 님의 손길같이 찬 것은 볼 수가 없습니다.”라는 구절을 처음 접할 때 우리는 ‘아, 님이 무정하다는 말인가?’하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용운의 시들에서 화자가 ‘님’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는 것을 아는 경우라면 이 대목이 다소 의외일 수도 있다(「복종」에 나타나는 한없는 순종의 마음을 보라). 그러나 시를 읽어 가다가 3연의 첫 문장(“나의 작은 가슴에 타오르는 불꽃은 님의 손길이 아니고는 끄는 수가 없습니다”)을 접하면서 우리는 ‘님’의 손길의 차가움이 ‘님’의 무정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사랑의 뜨거움을 전달하는 데로 향함을 보게 된다. (사실상 이미 2연의 마지막 문장인 “감로와 같이 청량한 선사(禪師)의 설법도 님의 손길보다는 차지 못합니다”에서 전환이 일어난다. 찬 것이 무언가 긍정적인 것과 연관되기 시작한 것이다.)8

우리는 이러한 기발한 착상을 단순한 말장난이나 궤변으로 볼 수가 없다. (한용운은 시적 기교와는 거리가 먼 시인이다.) 그것이 어떤 절실함의 전달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님의 부재’에서 오는 어펙트9의 강력한 절실함이 시인의 사유의 여러 층위를 활발하게 작동하도록 추동하는 느낌이 든다. 시적 사유의 활발한 활동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상상(력)이다. 기상도 상상의 한 형태이겠지만, 이것 말고도 다양한 양태의 상상이 그의 시들에 등장한다. 「명상」, 「슬픔의 삼매」 같은 환상적 성격의 상상이 전개된 시도 있고, 「나룻배와 행인」 같은 비유적 우화도 있으며, 「잠 없는 꿈」이나 「이별」 같은 극화(dramatization)된 대화 형태의 상상도 있고10, 「비」처럼 현실 속에서 맞닥뜨리는 상황―‘비’―에 자극된 상상(“나는 번개가 되어 무지개를 타고 당신에게 가서 사랑의 팔에 감기고자 합니다”)도 있다.

각각의 대목에서 상상된 상황을 통하여 전달되는 것은 ‘님’에 대한 사랑의 양태들이다. 그러나 ꡔ님의 침묵ꡕ 전체를 놓고 보면 상상력의 이러한 발동은 ‘님’과의 관계에서 가능한 여러 상황들을 떠올려 봄으로써 ‘님’이 침묵하는 상황에서의 삶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11

3. 시적 사유의 탐구성―“절망의 북극에서 신세계를 탐험”

이렇듯 한용운에게서 다시금 확인하는 것은, 현실 속에서의 절실한 지향에 의하여 추동되는 시적 사유는 필연적으로 탐구적인 성격을 가지며, 여기서 상상력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12 지향이 절실하다면 이미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인식에 그치지 않고 실현될 미지의 미래에로 상상의 힘을 탐침처럼 뻗칠 것이기 때문이다.13 여기서 필수적인 것은 고정된 진리 즉 도그마와의 결별이다. ꡔ님의 침묵ꡕ의 경우 명제적 형태의 진술―이는 이미 완료된 결론을 제시하는 느낌을 준다―이 도처에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한용운이 도그마를 내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는 그의 시들 전체가 띠는 이러한 탐구적 속성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시에 완결이란 없다. “나의 노랫가락이 바르르 떨다가 소리를 이루지 못할 때”라든가 “침묵의 음보”(「나의 노래」) 같은 구절에서 시사되는 바가 바로 이러한 비완결성이다. 그리고 「슬픔의 삼매」나 「어느 것이 참이냐」 같은 의미가 확연하지 않은 시들의 존재도 이러한 비완결성 및 그와 연관된 탐구의 노력과 관계가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ꡔ님의 침묵ꡕ의 거의 모든 시들이 ‘이별,’ ‘슬픔,’ ‘죽음,’ ‘눈물,’ ‘사랑’의 테마를 다루고 있음은 같은 내용의 반복이라기보다 탐구를 위한 변화주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이라는 테마를 들어보자. 「이별은 미의 창조」에서는 이것이 ‘눈물’과 궤를 같이 하며, 웃음에 이르는 필수적 단계로 제시된다(“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알 수 없어요」에서도 (앞에서와는 상황이 다르지만) 죽음은 삶에 기여하는 것으로 (삶의 일환으로) 제시된다(“타고 남의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가지마셔요」나 「나의 길」, 「이별」 등에서는 ‘죽음’이 부정적인 것으로 제시된다.14 「고적한 밤」 같은 시에서는 죽음이 사랑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님’도 그렇다. 많은 경우 ‘님’은 아예 부재하거나 침묵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님의 얼굴」, 「님의 손길」, 「당신의 마음」 같은 시는 부재보다는 존재(의 기억)―물론 그 양태는 각각 다르다―를 노래하는 쪽에 가까우며, 「어데라도」 같은 시는 ‘님’의 편재(遍在)를 노래한다(“어데라도 눈에 보이는 데마다 당신이 계시기에 눈을 감고 구름 위와 바다 밑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화자가 ‘님의 님’로서의 자신을 역설하는 시도 있고(「참말인가요」), 또 금강산의 ‘님’을 말하는 시도 있다(「금강산」). ‘님’의 부재와 존재의 이러한 다양한 양태는 시인이 ‘님’을 어떤 고정된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미지에 열려있는 탐구의 테마로 삼고 있음을 시사한다.15

이제 시 한편을 조금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한용운의 시에 구현되는 사유의 탐구적 성격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희미한 졸음이 활발한 님의 발자취 소리에 놀라 깨어 무거운 눈썹을 이기지 못하면서 창을 열고 내다보았습니다.
동풍에 몰리는 소낙비는 산모롱이를 지나가고 뜰 앞의 파초잎 위에 빗소리의 남은 음파가 그네를 뜁니다.
감정과 이지가 마주치는 찰나에 인면(人面)의 악마와 수심(獸心)의 천사가 보이려다 사라집니다.

흔들어 빼는 임의 노랫가락에 첫 잠든 어린 잔나비의 애처로운 꿈이 꽃 떨어지는 소리에 깨었습니다.
죽은 밤을 지키는 외로운 등잔불의 구슬꽃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고요히 떨어집니다.
미친 불에 타오르는 불쌍한 영(靈)은 절망의 북극에서 신세계를 탐험합니다.

사막의 꽃이여, 그믐밤의 만월이여, 님의 얼굴이여.
피려는 장미화(薔薇花)는 아니라도 갈지 않은 백옥(白玉)인 순결한 나의 입술은 미소에 목욕 감는 그 입술에 채 닿지 못하였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달빛에 눌리운 창에는 저의 털을 가다듬는 고양이의 그림자가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아아 불(佛)이냐 마(魔)냐 인생이 티끌이야 꿈이 황금이냐.
작은 새여, 바람에 흔들리는 약한 가지에서 잠자는 작은 새여.
( 「‘?’」 전문)

이 시에는 (“타고 남은 재가 기름이 됩니다”나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같은) 단언조의 명제들이 하나도 없다. 시인은 실제 현실에서 만날 법한 사실적 상황과 환상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듯하다. 1연의 첫 문장과 둘째 문장, 2연의 둘째 문장, 3연의 셋째 문장은 사실적인 상황에 대한 탁월한 묘사로서 그 자체로도 주목할만하지만, 여기서는 1연의 셋째 문장, 2연의 셋째 문장, 3연의 둘째 문장에서 도입되는 환상적 대목과 섞임으로서 묘한 효과를 낳는다. 이 효과는 사실적 묘사 대목의 차분함과 환상적 대목이 가진 (의미가 확연하지 않는 데서 오는) 혼란스러움이 대조되는 데서 온다. 영탄조로 된 3연의 첫째 문장은 세 이미지를 통사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단지 병치함으로써 세 이미지들의 관계를 시사만할 뿐 확정하지 않는다.16 마찬가지로 영탄조로 된 마지막에서 둘째 문장에서도 시인은 물음을 던져 놓을 뿐 확정을 짓지 않는다.

이것은 기교라든가 아니면 단순한 혼란으로 보이지 않고 ‘불’과 ‘마’, ‘인생’과 ‘꿈’의 경계를 진정으로 다시 회의하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그리하여 시 전체가 일종의 뚜렷하게 경계지어지지 않는 영역을 ‘탐험’하는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2연 마지막 구절 “미친 불에 타오르는 불쌍한 영(靈)은 절망의 북극에서 신세계를 탐험합니다”가 범상하지 않다.) 맨 마지막 문장의 “작은 새”는 그 앞 문장까지 이루어놓은 것에 비추어서 단순한 허약함의 이미지로 느껴지지 않는다.17 “바람에 흔들리는 약한 가지”의 위태로움도 왠지 단순한 위태로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혹시 모든 창조는 이러한 흔들림을 거치는 것이 아닌가?18 그리하여 “작은 새”는 미약하지만 미약하기에 계속 미지의 것으로 떠밀림으로써 앞으로 새로움을 낳을 수도 있는 존재가 아닌가? 제목 「‘?’」이 말하는 바처럼 확언할 수는 없다. 계속적인 숙고가 필요할 뿐.

4. 시적 구현―“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

지금까지는 한용운의 시에서 인식론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측면을 논의한 셈이다. 이제 한용운의 시에서 ‘의미’가 존재하는 방식에 관심을 돌려보자.19 우선 앞에 인용된 시 「‘?’」의 “동풍에 몰리는 소낙비”라든가 “움직이지 않는 달빛에 눌리운 창” 같은 표현을 보자. 여기서 “몰리는”과 “눌리운”이라는 표현으로 인하여 “동풍”의 힘이나 “달빛”의 무게감이 마치 우리의 몸에 직접 가해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또한 “몰리는”과 “눌리운”은 “비”와 “창”에 어떤 심리상태와도 같은 것을 부여하며 심지어는 일종의 표정까지 부여한다.20 이 뿐만이 아니다. “몰리는”과 “눌리운”은 “비”와 “창”에 붙은 형용어이지만 동시에 시 전체의 맥락에서는 일종의 전염성을 가지고 확산되어 화자의 상태―확정될 수 없는 것들 사이에 끼인 상태―를 전달하는 방향으로도 작용한다. 마치 실제 현실 속에서 일정한 장소 안에 존재하는 것들이 서로 영향을 끼치듯이 말이다.

또 다른 간단한 예로 “나는 님을 기다리면서 괴로움을 먹고 살이 찝니다. 어려움을 입고 키가 큽니다”를 들어보자(「자유정조」). ‘괴로움’과 ‘어려움’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살이 찝니다”와 “키가 큽니다”가 전달하는 것은 무언가 긍정적인 것이 무럭무럭 자라는 느낌이다. 시인은 한 문장 안에서 보통의 경우에는 잘 결합되지 않는 것을 결합하여 복합적인 효과를 낳고 있는 것인데, 이 효과가 산출하는 묘한 역설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이 시가 진정으로 전달하려고 하는 바―괴로움과 어려움의 기꺼운 긍정―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간략한 논의로는 시적 언어사용방식과 그것을 통한 시적 구현을 말하는 데 불충분할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한용운의 가장 대표적인 시 「님의 침묵」을 한 문장 혹은 두 문장씩 세밀하게 분석해 보기로 하자. 하나의 시 전체를 분석하는 하는 것은 시에서 작용하는 여러 요소들의 복합적이고 다양한 효과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님은 갔습니다”라고 간결하게 시작한다. 그러나 곧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의 영탄조로 이어지면서 “아아”와 “사랑하는 나의”가 내는 애절한 효과가 분출된다. “님은 갔습니다”의 간결함은 애절함을 발출하기 위한 발판 역할을 한다. 먹을 품은 붓이 힘을 모으기 위해 긴장된 상태로 점을 찍었다가 에너지를 발산하며 죽 획을 긋는 식이다. 그런데 “님은 갔습니다”는 그 애절함이 너무 갑작스럽게 다가오지 않도록 독자로 하여금 준비하게 하는 역할도 한다. 만일 처음부터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라고 시작하였다면 갑작스럽게 제시된 고양된 감정이 아직 준비가 안된 독자들에게는 겉돌거나 거슬리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구도가 간단하지만 색의 대조가 선명한 시각적 상황이 환기된다. 이로써 단지 감정 자체만이 제시되던 앞의 행이 어떤 구체적 상황과 연결되어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그 상황이 상황 자체만으로 환기되고 있지는 않다.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에서는 여전히 1행의 애절함이 유지되고 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형태상으로는 “황금의 꽃”과 “차디찬 티끌”의 대조가 뚜렷하다. “황금의 꽃”은 사실 독자에 따라서는 상투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비유이다. (한용운은 시에서 “황금”의 비유를 많이 사용하는데, 그 성패는 각자의 맥락에 달려있다.) 또한 “굳고 빛나던”과 중복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와 대조되는 자리에 놓이게 됨으로서 오히려 효과를 발휘한다. “굳고 빛나던”은 단순한 중복이라기보다는 ‘황금’의 견고함과 빛남을 더욱 ‘굳게’ 다지는 효과를 내며, 그럼으로써 이것이 “차디찬 티끌”이 되어 “한숨의 미풍”에 날아가는 허망한 변화를 더욱 강하게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날카로운”은 상투어와는 정반대로 강렬하게 살아있는 표현이다. (아마 ‘달콤한’ 정도가 상투어이리라.) 우리는 “첫 키쓰”가 화자의 마음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운명의 지침”은 현대 독자들에게 상투어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에 이어지는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는 그렇지 않다. “돌려 놓고”는 우선적으로 “운명의 지침”에 걸리는 말이지만, 동시에 화자의 몸이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그러고 보면, “운명의 지침”이라는 말은 설혹 그것이 상투어일지라도 이 맥락에서는 시적으로 적절하게 사용된 말이 된다.) 그리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는 ‘뒤돌아서 사라지는’ 것보다 이별의 애절함을 더 느끼게 한다. 상상해보자. 화자의 몸을 자기 쪽으로 향하게 돌려놓고서는 뒷걸음질쳐서 (즉 바라보고 있는 상태 그대로) 사라지는 ‘님’의 모습을.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는 앞에서 말한 대로 “날카로운”과 호응하여 ‘님’이 화자의 삶에 일으킨 엄청난 변화를 환기하는 효과에 기여한다. “향기로운”과 “꽃다운”도 상투어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것이나 여기서는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와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가 강력하게 작용하는 까닭에 “향기로운”과 “꽃다운”의 상투어로서의 존재는 미미하게 느껴진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은 이른바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잘 알려진 명제를 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명제가 갖는 지혜를 전달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다. 이 명제가 주는 지혜 덕분에 미리 ‘예상’한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정도로 이별의 충격이 크다는 말이다. “뜻밖의”와 “새로운”은 엄밀하게 보자면 앞 대목의 내용과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미리 예상하고 조심한 것이라면 뜻밖의 새로운 일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 ‘모순’이 이별의 충격이 더욱더 강하게 다가오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에서 전환의 울림이 울린다. 이전의 행들이 이별의 충격을 전달하는 데 줄곧 바쳐져 있었다면 여기서부터는 반대방향으로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다. 시중에 흔하게 유통되는 「님의 침묵」 읽기는 이 대목이 ‘슬픔의 극복’을 노래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우리가 틀렸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식의 ‘너무나도 추상적이기에 너무나도 맞는 해석’은, 수많은 ‘슬픔의 극복’들 중에서 여기 이 대목에 고유한 ‘슬픔의 극복’을 말하기에 적절하지 못하다. 따라서 이 대목이 가진 시로서의 힘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시인은 “슬픔의 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일반적으로 ‘슬픔’은 힘의 감소 즉 나약함을 말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슬픔의 힘”이란 역설적인 표현이다. 이 역설은 슬픔과 희망이 반드시 반대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옮겨서”라는 표현에서 이러한 암시는 더욱 확인된다. 힘을 옮기는 것이지 어떤 것에서 그 반대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요컨대, 슬픔과 희망이 연속적인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다.21 따라서 “슬픔의 힘”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면 “새 희망” 또한 그에 비례하여 강한 것이 될 것이다.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라는 표현은 옮겨진 “슬픔의 힘”이 마치 유체처럼 느껴지게 하며 이 유체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온 몸에 차오르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어지는 문장은 ‘회자정리’ 및 그 짝을 이루는 ‘거자필반’(去者必返)을 함께 푼 것이다. 이것이 이 시의 결론인가? 어떻게 보면 뻔한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앞의 모든 행들이 필요했던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결론이 중요한 논리적 진술과는 달리 시는 부분들이 서로 합하여 이루는 전체 몸체를 통해서 무언가를 구현한다. 이 전체 몸체에서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는 대목은 한 요소일 뿐이다. 이 대목은 별도로 비교하자면 유체적 힘이 온 몸에 차오르도록 구현된 바로 앞의 대목에 비해서 시적인 힘이 처진다. 그러나 전체 맥락 속에서 두 대목은 서로 협동하여 효과를 증폭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는 대목이 시를 단순한 풀어쓰기로 귀결시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첫 문장에의 “아아”는 맨 첫 행의 “아아”와는 다르게 느껴진다. 앞에서는 애절함을 표현했다면 이제는 강한 의지력이 추가된다. “정수박이”에 들어부어진 힘의 존재가 작용하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이 힘의 존재는 더욱 확연하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은 (앞의 “걷잡을 수 없는”처럼) 사랑의 노래가 가진 힘의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함을 느끼게 하며,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는 “사랑의 노래”를 유체의 소용돌이, 혹은 농밀한 기운의 소용돌이로 우리 앞에 구현한다. 물론 이 힘은 ‘님’이 ‘침묵’하는 상황에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이다. 그리고 이 힘은 파괴의 힘이 아니라 ‘사랑’의 힘일 것이요, 또한 노래(시)의 힘일 것이다.

5. 글을 맺으며―한용운의 현재성

「님의 침묵」에서 이렇게 힘차게 구현된, 슬픔이 전화된 ‘사랑’의 힘은 몇몇 개인들 간의 관계에만 작용하는 문제일까?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 「사랑의 존재」, 「어데라도」, 「알 수 없어요」 같은 시들, 그리고 “기룬 것은 다 님”(「군말」)이라는 구절은 ‘사랑’이 존재의 원리임을 시사한다. “일체만법(一切萬法)이 꿈이라면/ 사랑의 꿈에서 불멸을 얻겠습니다”(「꿈이라면」) 같은 구절에서 ‘사랑’이 특정의 개인에 대한 사랑으로 해석되는 것은―가능이야 하겠지만―한용운을 협소한 낭만주의자로 해석하는 것이다. “천지는 한 보금자리요, 만유(萬有)는 같은 소도(小島)입니다”(「낙원은 가시덤불에서」)라는 깨달음이 바로 이 원리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2

그러나 ‘사랑’의 힘은 여기저기서 장벽에 의해 가로막히고 경계선들에 의하여 분할된다. 실상 ‘님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님’이 물리적으로 부재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때보다 사랑의 에너지가 경계선과 장벽들로 인하여 막힌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때 더 의미심장하다. ‘침묵’은 부재보다는 특정 양태의 존재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의 거의 모든 단계에서 장벽의 설치와 경계선의 부과를 담당해온 사회적 힘은 권력이다. 권력은 역사적 시기마다 형태가 변하지만 언제나 사랑의 힘에 적대적이다.23 한용운이 당대에 맞섰던 것은 권력의 특정 형태―일본 지배세력의 조선 지배―이다. 그러나 한용운이 권력에 맞서는 원리로 노래하는 ‘사랑’의 원리에는 당대의 권력만이 아니라 모든 권력에 대한 저항과 비판이 함축되어 있다. 바로 여기에 한용운의 시들지 않는 현재성이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 남한의 권력은 형태를 바꾸면서 계속 존재해왔다. 이런 의미에서 ‘님의 침묵’은 여전하다. 그러나 권력은 사랑의 힘들을 서로 만나지 못하게 차단하고 충돌시키고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을 뿐 제거하지는 못한다. ‘사랑’의 힘은 만유에 작용하는 가장 원천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님의 침묵」에서처럼 ‘님’이 침묵하더라도 ‘사랑’의 힘은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권력의 존재는 오히려 억눌린 사랑으로 하여금 의식을 눈을 뜨게 하고 저항과 창조의 힘으로 전환시키며(“나의 눈물은 백천百千 줄기라도 방울방울이 창조입니다”「눈물」),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도록 힘의 ‘증대’를 꾀하도록 만든다. 실제로 해방 이후 사랑의 힘 또한 성장하였으며, 성장의 과정에서 많은 장벽들을 무너뜨렸다. 4․19 혁명. 5․18 민중항쟁, 6월 항쟁, 촛불시위 등등을 거치면서 “사랑을 만드는 기술”(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또한 더 고도화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한편으로는 전지구적인 규모로 행사되는 권력이 등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지구적인 규모의 사랑의 공동체라는 기획을 현실적 실천의 지평에 떠올릴 수 있는 시대에 들어섰다. 이제 사랑의 노래가 지구 전체를 ‘휩싸고 돌’ 시대가 된 것이다. ♠



Footnotes

  1. 「님의 침묵」에 대해서 ‘님을 향한 영원한 사랑’이라든가 아니면 ‘님을 잃은 슬픔과 그 극복’이 주제라는 식의―입학시험의 필요에는 잘 부응할 수 있는―요약적 접근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시를 이해하는 데 해악이 될 수 있다. 그 어구로 시를 대신할 것이며, 시가 쉬는 숨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많이 읽히는 강력한 원인일 수는 있다.˄

  3. 본 발제문에서의 논의는 ꡔ님의 침묵ꡕ에 실린 시들에 국한시켰다. ꡔ심우장산시ꡕ(尋牛蔣散詩)에 속한 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시조들은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했으며 선시 또한 한시이기에 논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4. ꡔ님의 침묵ꡕ의 시들이 시의 소장르로서 서정시로 분류되는 것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그 시들은 분명 극시(劇詩)도 아니고 서사시도 아닌, 서정시이다. 발제자가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서정주의’지 소장르로서의 ‘서정시’가 아니다.˄

  5. 시의 일부가 이런 논증적 형태를 취하는 경우는 매우 많아서 특별한 예를 들 필요가 없을 것이지만, 논증적 형태가 전체를 지배하는 시로서 시집 ꡔ님의 침묵ꡕ에서는 「사랑하는 까닭」, 「행복」을 들 수 있고, ꡔ심우장산시」에서는 「모순」을 들 수 있다. ,˄

  6. 이미 널리 알려진 명제들이 차용되는 경우도 있다. 뒤에서 볼 「님의 침묵」에서는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의 명제들이 삽입된다.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벌써 사랑은 아닙니다” 같은 구절(「사랑의 존재」)은 도덕경의 한 구절을 변형한 것이다. “사랑이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러 주는 것입니다” 같은 역설적 구절(「선사의 설법」)은 해탈의 일반적 의미를 뒤집은 명제이다.˄

  7. 이것이 영국의 형이상학파 시인들(Metaphysical poets)의 특성과 통함은 이미 백낙청에 의해 시사된 바 있다. 「시민문학론」, ꡔ 民族文學과 世界文學 ꡕ(창작과비평사, 1978) 53면 참조.˄

  8. 이 이외에도 “나는 영원히 시간에서 당신 가신 때를 끊어내겠습니다. 그러면 시간은 두 도막이 납니다./ 시간의 한끝은 당신이 가지고 한끝은 내가 가졌다가 당신의 손과 나의 손과 마주 잡을 때에 가만히 이어 놓겠습니다”(「당신 가신 때」) 같은 경우도 인상적인 기상의 사례이다.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금합니다”(「복종」)나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해탈(大解脫)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선사의 설법」)는 상식 혹은 우리에게 익숙한 지혜를 뒤집은 사례이다.˄

  9. 나는 ‘감정’이나 ‘정서’가 갖는 협소함을 피하기 위하여 ‘어펙트’(affect)를 사용하였다. ‘어펙트’에는 ‘기쁨(즐거움,’ ‘슬픔’ 등의 일반적인 의미의 정서만이 아니라 ‘어떤 것을 절실하게 지향하는 마음의 힘’도 포함한다.˄

  10. 실상 ꡔ님의 침묵ꡕ의 많은 시들은 극적 독백의 형태를 띤다고 볼 수 있다.˄

  11. ‘님’을 위해서는 기꺼이 죽겠다는 취지의 구절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ꡔ님의 침묵ꡕ의 화자들은 괴롭더라도 이별의 삶을 껴안고 살겠다는 태도를 보인다. 「명상」의 화자도 현살에서의 삶을 택한다(“명상의 배를 이 나라의 궁전(宮殿)에 매었더니 이 나라 사람들은 나의 손을 잡고 같이 살자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님이 오시면 그의 가슴에 천국(天國)을 꾸미려고 돌아왔습니다”). 물론 현실에서의 삶의 핵심적 원리는 ‘사랑’이다(“일체만법(一切萬法)이 꿈이라면/ 사랑의 꿈에서 불멸을 얻겠습니다” 「꿈이라면」).˄

  12. 한용운 자신도 시의 핵심으로서의 상상력의 힘을 명확히 의식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논개」)나 “사랑의 비밀은 다만 님의 수건에 수놓는 바늘과 님의 심으신 꽃나무와 님의 잠과 시인의 상상과 그들만이 압니다”(「사랑의 존재」) 같은 구절이 이를 확인해준다.˄

  13. 한 정치철학자에 따르면 상상력은 “‘장차 올 것’을 구축하기 위해 그 위에 그물을 던지는 제스처”이다(안또니오 네그리 지음, 정남영 역 ꡔ혁명의 시간ꡕ 3장 ‘유물론적 장’ 4.3). 그렇다면 모든 진정한 시인은 미래를 구축하는 데 복무한다는 점에서 이미 정치적이며, 한용운 또한 그러하다.˄

  14. 「이별」의 경우에는 전반부에 해당한다.˄

  15. 과학적 사유도 첨단에서는 시적 사유처럼 탐구적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과학적 사유가 탐구를 통해서 알게 될 미지의 대상을 고정된 것―객관적 법칙―으로 보고 그것에 접근하는 반면에 시의 탐구 대상은 그야말로 미지이다. 어떤 경우에는 기존에 확신했던 것조차 괄호가 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과학관은 카오스론의 등장과 함께 큰 도전을 받았으며, 객관적 법칙의 서술로서의 과학은 점차로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16. 영탄조 또한 한용운의 시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요소이다.˄

  17. “님이여, 끝없는 사막에 한 가지의 깃들일 나무도 없는 작은 새인 나의 생명을 님의 가슴에 으서지도록 껴안아 주셔요”(「생명」)에서 ‘작은 새’는 화자의 위태로운 생명의 비유로 사용되었다.˄

  18. 김수영의 「풀」에서 바람에 늘 나부끼는 ‘풀’과 비교해보라.˄

  19. 내가 여기서 말하는 ‘의미’란 어디에서나 같은 가치로 유통되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시를 이루는 단어들의 총체적 맥락에서 발생하는, 그 시에서만 존재하는 고유한 표현내용을 말한다.˄

  20. 이것은 의인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모든 의인법의 사례들이 이러한 생생한 구현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엄밀히 말하자면 어떤 대목을 의인법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일종의 동어반복이지 설명이 아니다.˄

  21. 다음 구절과 비교해 보라. “저리고 쓰린 슬픔은 힘이 되고 열이 되어서 어린 양과 같은 작은 목숨을 살아 움직이게 합니다”(「생의 예술」).˄

  22. 사랑의 원리에 대한 자각은 과학계에도 확대되었다. 생물학자인 마뚜라나와 바렐라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적 삶의 생물학적 기반으로서의 사랑을 축출하는 것, 그 윤리적 함축들을 축출하는 것은 35억 년 이상이나 된 생명체의 역사에 등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적 성찰에서 이성적 접근의 객관성을 잃을까 두렵다는 이유로 사랑이라는 개념을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책에서 말한 것에 비추어 보면 그러한 두려움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사랑은 깊은 뿌리를 가진 생물학적 동력학이다.” Humberto R. Maturana & Francisco J. Varela, The Tree of Knowledg:The Biological Roots of Human Understanding (Revised Edition), trans. Robert Paolucci (Boston & London:Shambhala, 1998), 248면.˄

  23. 권력은 예컨대 ‘국민은 하나다’와 같은 사이비 사랑의 논리로 자신의 지배대상을 묶어 그 경계를 확정한다. 그리고 다른 권력들과 경쟁하고 싸우면서 자신의 지배대상도 그 경쟁과 싸움에 끌어들인다. 또한 지배대상의 내부에도 수많은 장벽과 경계선들을 설정하여 지배대상을 분할하고 분할부분들 간의 경쟁과 증오를 조장한다. 또한 (자본주의적 권력의 경우에) ‘척도’를 부과함으로써 지배대상을 계량의 대상으로 만들어 관리의 효율성을 기한다.˄